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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의 상징적 인물인 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가 20일 오후 1시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 전 총재는 경북 포항 출신으로 부산상고와 고려대 상대를 졸업하고 1967년 제7대 국회의원이 된 뒤 7선 의원을 지냈다.
이 전 총재는 1960년 고려대 총학생회장으로 4·19 의거를 주도하는 등 학생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1970년대에는 신민당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계보에 소속돼 부산·경남(PK)를 대표하는 야당의 중진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1980년대에는 신민당 사무총장과 부총재, 통일민주당 부총재, 국회 5공비리조사 특별위원장을 지냈다.
1990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 창당에 참여하자 이를 거부하고 노무현, 홍사덕, 이철, 김광일, 박찬종, 고진화 등과 함께 꼬마 민주당을 창당해 총재를 맡았다.
199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끄는 신민주연합당과 '영호남민주세력의 대통합'을 기치로 내걸로 통합하며 민주당을 창당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낙선한 뒤 정계에서 은퇴하자 실질적인 민주당의 당권을 쥔 실세로 떠오르며 야권의 유력한 차기 주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1995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계에 복귀하며 민주당을 분당해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면서 당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기택 전 총재가 이끌던 민주당은 1996년 15대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에도 미치지 못하는 15석을 얻는데 그치며 제1야당의 자리를 새정치국민회의에 넘겨줬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DJP연대'를 기획하며 대권 행보를 지속하자 이 전 총재는 당시 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조순씨와 함께 한나라당과 통합에 나섰고 이회창 후보를 지원했다. 이후 1998년에는 한나라당 총재권한대행을 맡았다. 2002년 대선 과정에서는 과거 동지이지 부산상고 후배인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지만 2007년 17대 대선에서는 고려대 후배인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했으며 이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까지 지냈다.
이 전 총재는 7선 관록을 자랑하지만 1991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신민당과 합당한 뒤에는 번번이 지역에서 고배를 마셨다.
1996년 총선에서 그의 정치적 근거지였던 부산 해운대 기장갑에서 낙선한 뒤에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포항에서도 낙선하면서 결국 지역주의의 벽을 넘지 못했다.
빈소는 강남성모병원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4일, 장지는 4.19 국립묘지에 마련된다.
강희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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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6-02-20 1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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